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서의 변 (문단 편집) == 배경 == [[중종(조선)|중종]]은 평생 3번 결혼하였다. 제일 먼저 연산군 5년(1499), 아직 진성대군이던 시절에 [[단경왕후|신씨]]와 결혼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하자 아내 신씨 또한 왕후가 되어야 마땅했지만 반정공신들이 극렬히 반대하였다. 그래서 법궁인 경복궁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중종의 사저에 머무르다가 이레 만에 폐출되어 중종과 갈라졌다.[*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었는데 신수근은 박원종을 비롯한 공신들으로부터 반정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정작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였기에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결국 공신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당연히 보복을 두려워했던 반정공신들이 단경왕후를 반대하여 쫒아낼 수밖에... 신씨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폐비' 취급을 받다가 영조 15년(1739)에야 겨우 복위되었다.] 그해에 중종은 후궁으로 새 여자들을 받아들여 숙의(淑儀) 직첩을 내렸으니 숙의 윤씨, [[경빈 박씨|숙의 박씨]], [[희빈 홍씨|숙의 홍씨]]였다. 중종은 숙의 윤씨, 즉 파평부원군 윤씨의 딸을 골라 결혼하였으니 바로 [[인종(조선)|인종]]의 친어머니인 [[장경왕후]]이다. 장경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미래의 [[인종(조선)|인종]]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빈 박씨(중종)|경빈 박씨]]는 [[중종(조선)|중종]]에게 총애받던 후궁이었고, 장경왕후와 같이 궁궐에 들어와 숙의 직첩을 받았던, 역시 중전이 될 수도 있었던 후보였다. 당시 조선에는 임금이 왕후를 후궁 중에서 고르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예종의 왕세자 시절 후궁(종5품 소훈)이던 [[안순왕후]], 성종의 후궁(종2품 숙의)이던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가 그러했다.] 경빈 박씨도 중종의 세 번째 왕후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종의 마음도 내심 경빈 박씨에게 있었으므로 대신들에게 물어 타진해보려 하였다. 다만 경빈 박씨는 경상도 [[상주시|상주]]의 한미한 사족 박수림의 여식이라 집안에 힘이 없었다.[*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는 명문가 출신이다. 한참 뒤인 숙종 시절이 되어야 [[장희빈]]이 왕후가 되었다가 후궁으로 강등된 사례가 있다.] 실록에도 채홍사의 눈에 띄어 궁중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보다 앞서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중종 10/1515)에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대신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겠으므로, 정광필·김응기·신용개 등에게 간곡한 말로 물어서 그 뜻을 시험하였다. > >그랬더니 김응기는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신용개는 약간 허락하였으나,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제가(齊家)하는 요체(要諦)와 범조우(范祖禹)가 후비 간택을 논한 일을 진간(進諫)하니,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되었다. 사림(士林)에서 이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정광필의 이번 일은 송(宋)나라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이라 해도 더 낫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7월 22일 12번째 기사 위에 인용한 사신의 평에서 나오듯, 1515년 장경왕후가 죽어 차기 중전을 논의할 때 [[정광필]]은 '박씨의 집안이 명문이 아니라 미천하기 때문에 왕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사림 또한 이를 칭송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유, 또는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당시 대신들이 경빈 박씨가 왕비 됨을 경계한 진짜 이유는 국본(國本), 즉 왕세자 문제였다. 정광필이 총대를 메고 반대 의견을 표하자 다른 이들도 여기에 말을 함께 붙였다. 그리하여 중종도 물러났다. 그런데 여기서 중종의 말을 보자. >내가 듣건대 성종(成宗) 때에 [[공혜왕후]](恭惠王后)께서 승하하시매, 그 해(1474)에 곧 처녀를 간택(揀擇)해 두었다가 3년 뒤에 정하였다고 하는데,[* 성종 5년(1474) [[공혜왕후]]가 죽자 성종이 재위 7년(1476)에 숙의 윤씨, 즉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들인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중종의 말과 달리 폐비 윤씨는 공혜왕후가 죽기 전에 이미 궁에 들어와 후궁으로서 숙의 직첩을 받았다.] 이는 그때에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서둘러 할 것은 없다. 다만 궐내(闕內)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로 할 것인지 각별히 뽑을 것인지를 정승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3년 뒤에 명문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야 하리라. > >----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10월 2일 첫 번째 기사 예전에 뽑아두었던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은 전례가 있지만 그때는 세자(국본)가 없었고, 중종 자신의 경우에는 세자가 이미 있으니 꼭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종이 이 말을 한 이튿날, 중종은 정광필 등 대신 여러 명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대놓고 '적서' 문제와 '국본'을 이야기하였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중종이) 유순ㆍ정광필ㆍ김응기ㆍ김전ㆍ남곤ㆍ성몽정 등을 인견하였다. 유순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을 책립(冊立)하는 것은 국가의 큰 일이니, 근일에 행할 일이 아닐지라도 성려(聖慮)에 미리 헤아리셔야 합니다. 신이 《대학연의》에서 범조우 등의 바른 논의를 보고 상께서 아셔야 하겠으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습니다. 이 일은 상께서 반드시 고례(古禮)를 따르셔야 합니다. 진서산(眞西山)이 옛일을 여러 가지로 인용하였으나, 오로지 첩을 아내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옛 제후는 한 번에 아홉 여자를 얻고, 세 나라에서 잉녀(媵女)를 보내되, 한 사람만을 비(妃)로 삼았는데, 그 비의 자리가 비게 되어도 차서에 따라 계승(繼陞)하지 않은 것은 한때 같은 무리로 있던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면 아랫사람이 존경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이처럼 염려한 것입니다. 후세에서 계립(繼立)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는 하나 같은 무리에 있던 자를 올려서는 안 되고, 새로 가려서 세워야 적처를 다투는 일이 없고 궁중이 다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어 체모가 매우 합당하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은 유순이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대개, 범조우의 말이 곧 정례(正禮)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상께서 정례에 따라서 행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원자(元子)께서 어리더라도 인심은 크게 정해졌으니, 신의 마음에는 늘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하고, 또 이어서 중궁이 되신 이도 자기 소생을 사사로이 사랑하지 말고 원자를 자기 소생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으며, 정례도 저러하므로, 신의 생각을 아뢰었습니다. 상께서 내정(內政)을 워낙 우연하게 하지 않으시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어서 중궁이 되신 분이 만약에 '이는 내 소생이고 저는 남의 소생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이 싹트게 되면 일이 크게 어그러질 것입니다. 또,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正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鏌鎁)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 정적(正嫡)을 존중하는 것은 바른 예에 맞을 뿐 아니라, 만세를 염려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조종조에서 승봉(陞封)한 전례가 있을지라도 실로 정례에 맞지 않으며, 시세(時勢)도 다릅니다. 그때는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박절하도 참람한 마음이 없었으나, 지금은 국본이 이미 정해졌고 만세를 염려해야 하니, 성심(聖心)에 먼저 정해진 의향이 계셔야 하므로 아뢴 것입니다." 하고, 김응기가 아뢰기를, "신 등이 한때에 함께 의논하였으므로 뜻도 같습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적서의 분별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하지 않고 문란하게 하면 마침내 염려할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적서의 분별을 현격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 일에는 이미 옛 관례가 있으나, 국가의 전례(典禮)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위에 계시니, 널리 가려서 보신다면 어찌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아낼 수 없겠습니까?" 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고자 하신다는 분부는 지당하십니다. 처음 가릴 때에 자전께서 덕용(德容)과 위의(威儀)를 두루 보신다면 어진지를 알 수 있으니, 궁중에 오래도록 두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의(衍義)》에 실린 옛사람의 말은 참으로 만세토록 지당한 말이다. 정위(正位)가 엄하지 않으면 엿보는 폐단이 많을 것이다. 다만, 비(妃)를 맞아들이는 일은 한번 정해지면 가벼이 고칠 수 없고, 어질고 덕이 있는지도 하루아침에 알 수 없으므로 조종조에서 곧 정하지 않고 궁중에 오래 들어와 있게 한 뒤에야 정하였다. 측실(側室)은 명분이 이미 정해져 있는 자이므로 승봉하는 것이 이미 온편치 못하고, 새로운 사람은 문득 그 어질고 덕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며, 또 대신의 의향을 아직 모르므로 묻는다." (중략) 유순이 아뢰기를, "상께서 거기까지 염려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덕이 없는 자가 계립(繼立)하여 자기 소생이냐 남의 소생이냐에 뜻을 두면, 국본이 계시므로 마침내 지극히 어려운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정중하게 가려야 합니다."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것이 다 충성된 말이요 지극한 생각이며, 상께서 때아니게 전좌(殿坐)하여 마음을 비워 놓고 받아들이시니, 참으로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국가에 어찌 이처럼 중대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국가에 변고가 있어 궁중의 정위가 비게 되었으니, 이어서 명분을 닦는 일을 처음부터 바르게 해야 합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집을 다스리는 데에 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자면 먼저 집안의 일을 바루어야 하니, 적서의 분별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근래 천재가 잇달아 이르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남도(南道)에서도 세 발 달린 닭이 났는데, 옛글에 다 여자로 인한 화난인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옛글은 비록 끌어대어 얽매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나, 내정(內政)은 더욱이 엄해서 처음부터 엿보는 조심이 없게 해야 마땅한데, 이 또한 천변에 참되게 응답하는 것이 됩니다." (중략) 김전이 아뢰기를, "근래 천재가 매우 많으니, 공경(公卿)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두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연의》에 표를 붙여서 바친 것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서 시작한다.' 하고 또 '부부는 생민(生民)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다.' 하였거니와, 적서의 분별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면 마침내 화환(禍患)이 클 것입니다. 조종조의 고사가 있기는 하나 시세가 다르니 지금에 있어서는 마땅하지 않으며, 지금은 원자(元子)께서 어리시니 더욱 신중히 해야 할 때입니다. 신중할 수 있다면 미리 궁내에 들어오게 하지 않더라도 어진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융례(隆禮)에는 기한이 있는데, 처음부터 명분을 바르게 하지 않고서 오래 궁중에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10월 3일 2번째 기사 대신들이 경빈 박씨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명확하다. 박씨를 중전으로 들이면 '적서의 차별이 깨진다.'는 것이다. 만약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당연히 중종의 적장자는 복성군이 된다. 원래 복성군은 서장자이고 인종이 중종의 적장자인데,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면 복성군이 적장자, 인종이 적차자가 된다. 성리학적 종법질서에서는 한번 정해진 상하관계가 깨지는 것을 거부하였다.[* 일개 세자빈에 불과하던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남편인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덩달아 대비가 되고 아예 예종비 [[안순왕후]]보다 윗서열에 앉게 되자 신하들이 반발했던 것도 물론 의경세자(덕종)가 [[예종(조선)|예종]]보다 형이긴 하나 덕종은 엄연히 추존왕이었기에 예종 생전에 인수대비는 그저 전직(?) 세지빈 신분으로 아예 왕과 왕비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와는 비빌 수도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종 생전에 이미 안순왕후와 인수대비는 군신관계였는데 이를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었다고 바꿀 수 없는 노릇이라는게 반대측의 논리였다. 때문에 이를 추진했던 [[정희왕후]]는 세조가 생전에 안순왕후더러 인수대비를 어머니처럼 여기라고 했다는 말까지 해야 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 역시도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지만 자순대비는 왕후가 될 때 자식이 없었고 성종은 연산군의 지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애초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폐비되었을 뿐이라 그럴 명분도 없었고. 그래서 연산군과 중종의 적서관계는 연산군이 폐위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임금의 어머니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한은 없지만, 그런데도 어머니로서 아들-임금보다 윗사람이 된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윗사람이고, 이 관계를 깨트림은 패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래 서장자였으나 적장자가 되어 본래의 상하관계가 깨짐 역시 매우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정광필은 직설적으로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아들을 둔 후궁, 즉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면 적자와 서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깨진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또한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正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鏌鎁)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광필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적서의 구별이 깨지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차기 임금이 누가 될지 다툼이 생기는 것이었다. 정광필뿐만 아니라 자리에 동석한 대신들은 여러 번 비슷한 문제를 거듭 강조하며 경빈 박씨를 거부했다. 다만 임금의 체면이 있으므로 완곡하게 돌려 말했을 뿐이다. 유순은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하였고, 김전은 "적서의 분별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면 마침내 화환(禍患)이 클 것입니다." 하였다. 게다가 당시 대신들은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도 짚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자기 배로 낳은 아들을 미래의 임금으로 밀어줄 테고, 복성군 또한 '나도 적자인데 왜 내가 왕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하며 야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기 임금의 자리를 두고 조정이 두 쪽이 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시점(1515)에는 아직 중종은 공식적인 세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훗날 인종이 되는 왕자가 태어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보통 세자는 여덟 살에 책봉되었다. 그나마 인종은 워낙 특출나다는 이유로 남곤이 건의하여 여섯 살에 책봉되었지만, 아무튼 세자를 책봉할 여건이 아니었었음은 마찬가지. 하다못해 원자로라도 책봉되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왕비 자리에 올라 복성군이 적장자가 된다면, 중종이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외척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외척이라는 것이 성리학적 질서를 따르는 조선에서는 당연히 배제대상이다. 보통은 명예직만 전전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권신이 되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윤임이 힘이 있던 것도 시대가 권신들이 활개치는 시대였기에 가능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척은 어쨌든 왕의 외가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왕의 지지기반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경왕후는 파평 윤씨 집안이라 집안이 좋았지만 경빈 박씨는 너무 집안이 한미했다. 집안이 한미하다는 것은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전횡하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외척에 대한 태도 취지에는 좋았지만 '복성군 VS 인종' 으로 집안싸움이 날 판에서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집안싸움이 일어나면 서로의 세가 중요한데 외척 면에서는 복성군이 떨어진다.] 결국 중종은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택하기를 포기하고 재위 12년(1517)에 새로 여자를 간택하여 왕비에 올렸으니 바로 [[문정왕후]]이다. 경빈 박씨는 처음 궁궐에 숙의로 들어온 때에 장경왕후에게 밀려 중전이 되지 못했듯, 중종 12년에도 문정왕후에게 밀려 또다시 중전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경빈 박씨는 미래의 인종에게 원한이 있을 수 있었고,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진 지위가 아쉬울 법하였다. 물론 신하들은 설사 인종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반대했을 수 있겠지만... 문정왕후가 아니더라도 조선시대의 왕비들은 희빈 장씨 같은 예외를 빼면 죄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중종은 재위 15년(1520)에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궁궐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임금에게 적장자가 없다면 적차자가, 적차자마저 없다면 서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만약 세자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문정왕후가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중종의 서장자로서) 복성군이 다음 임금이 될 수도 있었다.[* 종법질서에 따르면 제위계승 순서는 적장자→적장손→적장자의 적자→적장자의 서자→적자→기타 적손→기타 서손→서장자 순이다. 근데 인종이 자식을 낳기 전에 죽고 문정왕후에게도 아들이 없다면 서장자보다 우선순위 후보자들이 모두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